憂中山行, 雨中山行, 醉中山行,含哺鼓腹

지난 토요일 등산에 막 재미를 붙인 알렉스는 파찌아빠와 가는세월 형님과의 북한산 등반을 약속하고 3호선 불광역에서 만났습니다.
1. 憂中山行
산에 가기 전날인 금요일 저녁 케이티님이 그렇게 강조하시던 디자스터한 날씨가 토요일 오전까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비만 오면 다행인데 일기예보는 계속해서 중부지방 게릴라성 집중호우 예보를 하면서 산에 올라갔다가 조난 당한 사람들 구조하는 장면을 방영해주더군요. 출발 전에 티브이를 보면서 산행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약속은 했으니 안갈 수는 없고 나가서 어떤 감언이설로 산행을 포기시킬까 하는 시나리오까지 작성해놓고 3호선 불광역으로 나갔습니다.
평소 같으면 등산객으로 가득 차야할 불광역에 인파는커녕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죠. 잠시후 환한 웃음을 지으며 저에게 다가오는 어설픈 유격조교 복장의 파찌아빠와 만났습니다. 뒤이어서 예비군 복장의 가는세월님도 오셨습니다. 산행을 포기하자는 말은 꺼내보지도 못한 채 두분의 뒤를 졸졸 따라 독바위역까지 이동하였습니다.
비가 적잖이 내리고 있었지만 두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표소 쪽으로 올라가시더군요. 매표소 앞 매점에서 막걸리 두통과 물을 사는 동안 산행을 만류해보려고 하는 순간 매점 아저씨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산은 비올 때 가야 제맛입니다." 엉겁결에 맞장구를 치게 되었죠. "하하 산을 아시는군요.(아~ 이 말이 나올 찬스가 아닌데..)" 하는 수 없이 매표소까지 올라갔습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이 도와서일까요 매표소 앞에 다다르자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직원이 나와서는 "여러분 죄송합니다. 금일 입산 완전통제입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심 쾌재를 부르고는 겉으로는 "아이참 멀리서 날잡아서 왔는데 그냥 들어가면 안되나요?" 라며 마음에 없는 말을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전 당연히 집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산 자락에 사시는 가는세월형님의 안내와 파찌아빠의 투지가 결합하여 두분은 끝내 북한산으로 올라가는 개구멍을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한발한발 산에 오르기 시작하는데 걱정이 앞섭니다. 중간에 게릴라성 폭우를 만나서 119 헬기타고 내려오는 상상도 해봅니다. 말 그대로 憂中山行의 시작입니다.
2. 雨中山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발걸음마다 근심입니다. 등산화가 비에 젖지는 않을는지, 미끌어지지는 않을는지, 등산복이 젖어서 다리에 감기지는 않을는지....... 행동 하나 하나가 모두 걱정입니다. 그러던중 빗줄기가 거세어 지면서 온몸이 물에 흠뻑 젖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온몸이 물에 젖으니 걱정거리가 사라지더군요. 등산화가 젖을까봐 고인 물을 피해가던 발걸음이 가벼워지면서 아무 곳이나 내 딛습니다. 비에 젖을까봐 걱정되던 배낭과 등산복 걱정도 없습니다. 거세어지면 어찌 이겨낼까 걱정하던 빗줄기도 오히려 시원하기만 합니다. 산에다 몸을 맡기니 제 체중이 가벼워지더군요. 雨中山行이 이렇게 즐거운지 몰랐습니다. 빗줄기가 거세어 질수록 머리는 더욱 시원해지고 몸은 더욱 가볍습니다. 어느새 족두리봉을 지나 향로봉까지 왔습니다. 관악산을 올라갈 때 보다 훨씬 힘이 덜 들더군요. 산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시내는 동해 바다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구름에 휩싸여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연출해 주더군요. 잠시 쉬었다가 내친김에 비봉까지 올라갔습니다.
3. 醉中山行
비봉에 올라보니 우리처럼 개구멍을 통해서 들어온 분들이 계시더군요.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들도 하시고 쉬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도 준비해간 막걸리와 떡, 가는세월 형님 시골집에서 따온 자두를 먹었습니다. 산에서 먹는 막걸리와 떡은 참으로 달고 맛있었습니다. 아마도 맛으로 먹는 음식보다 내 몸이 필요로 하는 영양분을 전달하는 음식이라 더욱 맛있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막걸리 한 두잔에 살짝 취기가 올랐습니다. 좀더 산행을 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만 제가 우겨서 구기동 길로 하산했습니다. 내려오는 길은 그야말로 폭포길이더군요. 비가 많이 와서 등산로 곳곳으로 물이 흘러 내려갑니다만 올라올 때와는 다르게 개의치 아니하고 잘도 내려갑니다. 역시 취중산행이 무섭더군요.
4. 含哺鼓腹
산에서 내려와서는 가까운 사우나를 찾았습니다. 세명 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흠뻑 젖어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다들 신기하게 쳐다봤지만 그 눈길이 싫지는 않더군요. 어차피 젖어있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어렵지 싶었습니다. 등산하는 기분으로 걸어서 불광동 사우나에 들어갔습니다. 냉온탕을 반복하고 각자의 수영실력도 점검하고는 준비해간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니 뽀송뽀송한 느낌에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맛집의 대명사 파찌아빠와 같이 간 산행의 끝은 맛집 탐방이었죠.
응암동 장군 감자탕으로 갔습니다. 들깨가루와 야채를 뼈위에다 올려놓고 끓이기 시작한 감자탕은 소주가 한 순배 돌아갈 즈음에 그 맛이 우러나기 시작합니다. 뼈에 붙은 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 살 속에 파묻힌 뼈를 찾아 내는 것처럼 고기가 푸짐한 집이었죠. 소주를 네병이나 시켜 먹으며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김가루와 다진 양념으로 밥까지 볶아 먹고는 아쉬운 산행을 마감했습니다.
다음 번에는 의상봉 능선을 가보기로 했습니다. 억수같은 비 때문에 북한산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산의 위용을 느끼기는 충분했습니다. 멀리 소백산, 속리산도 좋은 산입니다만 어떤 연유인지 북한산에 더욱 정감이 갑니다.
사진은 한 장도 찍지 못했습니다. 머릿속에 그대로 간직해 놓았습니다. 사진보다 선명하게 말입니다. 글로 표현할 재주가 없어서 사진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북한산에 첫발을 내딛고 감동받은 알렉스 이었습니다.

by 밤안개 | 2004/07/19 09:11 | 재미있는 레포츠 | 트랙백(1) | 덧글(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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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파찌가족 여행기 at 2004/07/19 11:56

제목 : [파찌산행] 세남자의 속 시원한 산행 이야기 [북한산]
============================================= 언제 : 2004년 7월 17일 토요일, 당일(am 08:17~pm 16:40) 어디 : 1. 북한산 : 독바위역-정진매표소(출입금지)-정진사 옆 개구멍-수리봉(우회)-향로봉(우회)-비봉(우회)-사모바위(雨中음주)-이북5도청-구기터널 2. .....more

Commented by 케이티 at 2004/07/19 10:46
앗...
이런..글만 봐도 부럽습니다.

전..그냥..잠만 잤다는..ㅡ.,ㅡ;;
Commented by 파찌아빠 at 2004/07/19 12:43
토요일...별로 편하게 자지는 못 했을 겁니다. 파찌아빠와 알렉스가 얼마나 씹었는데...귀가 간질간질...ㅎㅎ
Commented by alex13 at 2004/07/19 16:45
다음에 꼭 같이 가요^^;
Commented by 케이티 at 2004/07/19 18:17
그럼..그날 그렇게 날 괴롭혔던 그 악몽이?!!!
ㅋㅋㅋ
Commented by 흰숲 at 2004/07/19 10:48
음.. 무서운 분들이군요..
Commented by alex13 at 2004/07/19 16:45
하나도 안무서운 착한 아자씨들입니다.
Commented by 구름 at 2004/07/19 11:06
얼마나 감동적인 산행이었는지 그대로 느껴지는데요.^^
북한산, 저도 넘 좋아하는 산이예요, 가까이 살아서 자주 올랐었거든요.
산-사우나-감자탕, 캬~ 끝내주는 코스였네요...그저 부러울 따름 입니당. ^0^
Commented by alex13 at 2004/07/19 16:46
8월초에 의상봉 능선 타기로 했거든요^^; 그때 꼭 같이 가시죠~~
Commented by 구름 at 2004/07/20 00:02
헹~ 약올리지 마세용~
저두 언젠간(ㅠㅠ) 미국서 산에 오르고 말리이다...흑~
Commented by 가는 세월 at 2004/07/19 11:08
ㅎㅎ 다찌아빠 글투(?)로 쓰셨네... 저두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Commented by alex13 at 2004/07/19 16:46
앗~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글투가 다찌아빠를 닮는군요^^;
Commented by 다찌아빠 레이 at 2004/07/20 14:17
ㅋㅋ 좋은 현상이여...
Commented by 말짜 at 2004/07/19 11:14
뭔가!를 해내셨군요?ㅎㅎ
정말 부럽습니다.
저야말로 매일 부러워만할께아니라
혼자라도 산에 다닐수있는 담력을 길러야겠습니다..
(그 소주맛! 먹어본사람만이 압니다..)
Commented by 파찌아빠 at 2004/07/19 12:42
산에서 먹는 소주 맛과 비에 젖은 막걸리의 맛은 엄청 다른데...진짜입니다. 알렉스 한테 물어보세요...ㅋㅋㅋ
Commented by alex13 at 2004/07/19 16:47
산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막걸리 입니다. 치악산 갈때 연락 드릴테니 꼭 나오세요~
Commented by 꼬깔★Κωνος at 2004/07/19 12:57
정말 멋진분들이십니다.^^ 에구 어제 하루 뭘 했는지 부끄럽사옵니다...
최근에 휴일이 없어 퍼 자기만 하는 바람에... 정말 산행을 결심하고 실행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닌데 3분 모두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좋은 하루 되세요~!
Commented by alex13 at 2004/07/19 16:48
꼬깔님도 담에 같이 가시자구요^^; 공룡화석 발견할지도 몰라여~
Commented by 꼬깔★Κωνος at 2004/07/20 07:40
으하하~!!^^ 그렇담 꼭 같이 가야겠군요~!^^ 좋은 하루 되세요~!
Commented by 히메 at 2004/07/19 17:50
대단하세요. 알렉스님이 남겨주신 히메네 블록 답글에서 왜 그렇게 힘찬 느낌이 들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산을 점점 더 좋아하시게 되는 그 모습, 그러다 이제는 누구보다 더 좋아하게 되실 그 모습이 참 보기좋네요... ^^
Commented by alex13 at 2004/07/20 11:10
다음번 산행은 히메님이 책임 지셔야죠~
Commented by 리딩가드 at 2004/07/19 17:52
사진이 없어도 그 느낌을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점점 산행의 즐거움과 멋을 알게 되고 산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시는 것 같아 덩달아 즐겁습니다.
더 멋진 산행 기대해봅니다~~~
Commented by alex13 at 2004/07/20 11:06
미숙님~~ 등산 같이 할까요?
Commented by simsulvo at 2004/07/19 18:08
진짜 좋았겠다 !
Commented by alex13 at 2004/07/20 11:07
일단 와보시라니까...
Commented by [컬리] at 2004/07/19 20:20
어땠는지 궁금했는데..잘다녀오셨네요.
대단하세요.그 전날 헤어진 시간이 몇시인데..--;;;

신기회를 등산으로 하여서..다 같이 올라가면 잼있겠네요..ㅋㅋ
각자 막걸리 지참하고...혹은 식성껏 들고 오는것도..^^;;
Commented by alex13 at 2004/07/20 11:05
궁금합디까? 그럼 친하게 지냅시다..등산 한 번 할까요? 나 요즘 등산에 취미 붙였잖아요..^^V
Commented by [컬리] at 2004/07/20 14:56
흐흐흐...

그럼 친하게 지내 봅시다...

청주 가지고 등산하면서!
Commented by 공간과디자인 at 2004/07/19 23:59
한자를 보니 무협지를 보는 듯 합니다
Commented by alex13 at 2004/07/20 11:06
무협지도 많이 읽었습니다. 소시적에. ㅎㅎㅎ
Commented by 공간과디자인 at 2004/07/20 12:56
그럼 어릴적에 이층에서 뛰어 내려봤겠네요..
Commented by 麒麟 at 2004/07/20 04:57
등산을 꽤 좋아하시나봐요. 저는 몸 움직이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그런지 운동같은 거에는 별로던데..;;
Commented by 흰숲 at 2004/07/20 08:56
저도 그래요.. 알렉스님 잘 아시겠지만 제 생활신조가..
"힘든 건 아랫것들이!!"
Commented by alex13 at 2004/07/20 11:03
푸하하하~~ 힘든건 아랫것들이.. 멋집니다.
Commented by 麒麟 at 2004/07/20 12:02
멋져요..>ㅅ<b 저도 앞으로 그래야겠어요.ㅋㅋㅋ
Commented by [컬리] at 2004/07/20 14:58
귓가에 뱅뱅..
흰숲님의 중후한 멋진 음성으로
"힘든 건 아랫것들이!!" 라고 얘기하시는게..ㅋㅋㅋ
Commented by 「 BlueRidge 」 at 2004/07/21 00:03
아항~ 이 코스를 타셨군요...저와는 완전히 반대방향에 계셨네요...^^;
언제고 여기에 자주 등장하시는 주인공님들과 함께 산행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될 기회가 오겠지요.
그날을 위해 더 열심히 다녀야겠습니다...^^*
늘 안전한 산행하시구요...언제나 행복하세요...^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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